KBS 2TV의 8부작 월화드라마 <한성별곡 正>(이하 <한성별곡>)은 흥미로운 작품이다. 8부작이라는 분량도 그렇고, 사극답지 않은 연출과 미장센도 그렇고, 미스터리 구조의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심지어 홈페이지에 올려놓은 제작진의 빼곡한 명단마저 신선하다. 더군다나 조선왕조 중 가장 격동적인 시대였던 정조 시대를 연상시키는 단서들과 대선이라는 정국까지 맞물려 정치성 논란까지 야기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성별곡>은 최근 몇 년간 KBS의 자체제작 드라마 중에서 가장 감각적인 드라마로서 많은 부분들을 궁금하게 하는 작품이다. 다음은 <한성별곡>의 5회 방송을 앞둔 저녁, KBS 별관에서 곽정환 감독을 만나 나눈 얘기들이다.
: 3년 전에 이미 기획된 작품이라고 들었다. 그러고 보면 KBS는 작년에도 <1호관 살인 사건>이나 <도망자 이두용> 같은 4부작 드라마를 만들기도 했다. <일단 뛰어>는 애초에 연출보다 기획에 힘을 싣는 드라마라고 듣기도 했고. 8부작이라는 형식은 어떻게 나왔나.
곽정환 감독: KBS의 이런 시도들은 드라마 외주제작사 중심의 구조와 밀접하다. 외주제작사가 드라마 제작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KBS 내부적으로 논의가 많았다. 대안적으로 자체제작과 다른 방송사와의 차별성을 고민한 결과가 내부 기획안 공모전이었다. 3년 전부터 매년 진행하고 있는데, 나는 이미 2년 전에 박진우 작가와 4부작 기획안을 냈다가 제작되지 못한 경험이 있다. 이후 4부작과 8부작에 대한 논의를 하다가 마침 박진우 작가가 써놓은 사극 단막이 흥미로워서 그걸 8부작으로 늘렸다. 그게 지금의 <한성별곡>이다. 아이디어는 3년 전에 나왔고, 기획안은 작년 초에, 그리고 촬영은 올해 3월에 시작했다.
: <한성별곡> 얘기를 해보자. 정확히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진 건가.
곽정환 감독: 3월 6일, 마지막 눈이 내리던 날 첫 촬영을 시작했다. 작년 기획안 공모 당선 이후 가을부터 대본작업을 해서 12월에는 끝내려고 했는데, 박진우 작가나 나나 긴 호흡은 처음인데다가 대본 수정을 회당 8, 9번씩 진행하느라 오래 걸렸다. 대본 수정에 시간을 무척 많이 투자했다. 3년 전에 준비하던 4부작 드라마가 엎어지고 사실은 선배들의 공동연출을 자원했다. 그동안 <이 죽일 놈의 사랑>과 <황금사과>를 공동 연출했다. 사실은 공동연출로 도망친거지. (웃음) 나는 5년차 교양국 PD로 있었다. 드라마 감독으로 입사를 했는데 교양으로 발령이 나는 바람에. 어쨌든 이래저래 <그들의 진실-진실한 그들>로 단막 데뷔하기까지 오래 걸렸다.
“영상미나 작품성이 좋은 것은 스태프들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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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인 타이틀에 나오는 스태프들의 이름 | |
: 박진우 작가와 어떻게 만났는지도 궁금하다.
곽정환 감독: 개인적으로 김지우 작가를 좋아하는데 워낙 바빠서 단막도 자주 못한다. 그러다가 인턴시절부터 알고 있었던 박진우 작가가 취향도 비슷하고 하고 싶은 작품도 비슷하니까 박찬홍 감독과 김지우 작가처럼 나도 이 사람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사실은 데뷔 준비작이 엎어진 뒤에 박진우 작가와 4부작을 하나 더 썼는데 그것도 안 되어서, 내가 이 사람을 어떻게든 장편 데뷔 시켜야겠다고 다짐한 면도 있었다.
: 미니시리즈 데뷔를 신인 작가와 신인 배우들과 함께 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곽정환 감독: 그 동안 미니시리즈 공동연출과 프로듀서, 조연출을 하면서 많은 걸 느꼈다. 신인 작가와 배우들을 고집한 이유는 일단 작품에 집중해야할 시간을 캐스팅으로 날려버리는 게 아까워서 그렇고, 스타 시스템이 가진 한계를 깨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주인공과 대본이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멜로가 아닌 이상 대부분의 작품들은 스태프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영상미나 작품성이 좋은 드라마가 있다면 그건 결국 그들의 힘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충분한 시간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사전제작으로 가자고 결정했다. <한성별곡>의 타이틀에는 배우들 대신 스태프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주제의식을 숨기는 사극이라는 외투
: 굳이 사극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나.
곽정환 감독: 솔직히 사극 조연출도 맡으며 사극의 노하우는 익혔다고 생각하지만, 사극 자체를 그리 좋아하지는 않는다. (웃음) 일단 나는 주제의식이 강한 작품을 좋아한다. 교양국에 있을 때에는 <공개수배 24시>를 2년 정도 맡으면서 수사물과 장르물에 대한 관심도 늘었고. 박진우 작가도 수사물과 토속적인 이야기를 좋아하는데 우리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일단 사회성이 짙은 이야기였다는 게 문제였다. (웃음) 드라마는 오락적이면서도 주제의식이 뚜렷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의식이 강하면 재미가 없어진다. 우리로서는 이걸 숨기기 위한 외투가 필요했는데, 그게 바로 사극이라는 외투였다. 여기에 연쇄살인이라는 요소가 오락성을 더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단, 기존 사극과 극명하게 다르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태프들도 사극 경험이 없는 사람들 중심으로 뽑았고 배우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확신대로 기존에 없던 방식을 밀어붙여야 했기 때문이다.
: 첫 회, 첫 장면에서 ‘殺而救國’이란 문장을 쓰는 장면이 남달랐다. (웃음) 공간의 압박감을 극대화시키는 광각으로 찍었는데, 예상대로 연출이 감각적이고 속도감도 빨랐다.
곽정환 감독: 사실 <한성별곡>의 화면은 강장수 촬영감독과 이용호 조명감독 덕분이다. 표민수 감독의 <푸른안개> 조연출을 하면서 알게 된 강장수 감독이 콘티에 있어서 많은 도움을 줬고, 이용호 감독은 매 컷마다 다른 조명을 쓰자는 굉장히 힘든 제안을 흔쾌히 받아줬다. 만약 이 작품의 영상미가 좋다면 모두 이 분들 덕분이다. 사실 <한성별곡>은 의도적으로 연출의 스타일을 배제하려고 애쓴 작품이다. <이 죽일 놈의 사랑>을 하는 동안 스타일이 논란이 되는 경험을 한데다가 특히나 <한성별곡>은 논란이 될 여지가 많은 작품이었는데 여기에 스타일이 개입하면 더 혼란스러워질 것 같아서였다. 오히려 스타일보다 미장센에 더 집중했다.
: 그래도 박상규와 이나영이 재회하는 장면마다 벚꽃이 날리는 연출은 좀 과하다는 느낌도 든다. (웃음) CG도 간간이 눈에 띠고.
곽정환 감독: 그게, 안그래도 하도 말을 많이 들어서 놀랬다. 그렇게 부담스러운가. 그런데 내일 또 나오는데... (웃음) 눈 날리는 장면은 CG가 아니다. 계절이 변화하는 장면에만 CG가 사용되었다.
: 미장센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했는데 안 그래도 배경과 의상의 색감을 통일하거나 공간과 그룹에 따라 빛과 색을 다르게 찍은 장면들이 눈에 띄었다. 특별히 미장센에 주목한 이유는 뭔가.
곽정환 감독: <한성별곡>은 박상규, 이나영, 양만오라는 젊은이들이 각기 다른 가치관으로 부딪치는 이야기다. 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개인으로만 존재할 수가 없다. 끊임없이 그가 살고 있는 시대와 관계 맺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도 하나의 캐릭터처럼 보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8부작이라는 조건이 있기 때문에 대사나 감정으로 인물과 사회의 관계를 그릴 시간이 없었다. 미장센에 대한 고민은 그래서 나왔다. 캐릭터들이 보여지는 공간이 중요했고 공간에 위치한 사물들이 중요했다. 캐릭터들의 욕망이 가능하게 된 배경들이 결국 그 시대를 설명하는 물건들이나 공간이기 때문이다. 8부작에 맞는 호흡과 속도감을 위해서 함축적인 대사와 압축적인 공간으로 분위기를 만들었다.
“사실 정조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 고증에 있어서도 그런 점을 고민한 건가?
곽정환 감독: 비슷하긴 한데, 고증은 시대에 대해 고민한 결과였다. 굳이 정조 시대라고 밝히진 않지만, 밝히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배경으로 정조 시대가 필요했던 이유는 그 때가 바로 주인공 3명의 욕망과 가치관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양란 이후에 새로운 문물이 들이닥치며 조선의 기반을 흔들던 시대, 계급적 차이를 무너뜨릴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기반으로 더 이상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백성들의 의식이 각성되던 시대였다. 이런 불안한 시대야말로 사회라는 거대한 공간에 개인의 욕망이 꿈틀거릴 틈이 생기는 시대다. 사실 정조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냥 임금이라고 밝히는 이유도, 그가 아무리 개혁적이었다고 해도 역사가 한 개인에 의해 흘러가거나 바뀌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심지어 <한성별곡>의 임금은 한계가 있는 인물이다. 양만오와 박상규도 마찬가지로 피해의식도 있고, 한계도 있는 인물이고.
: <한성별곡>의 소품들도 기존 사극과는 낯설다.
곽정환 감독: 이어서 얘기하자면, 이나영이나 박상규나 양만오가 왜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가를 설명하려면 보여주는 것 밖에 방법이 없었다. 도성에 인구가 차고 넘친다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보여주나. 사치가 극에 다다랐다고 하는데 그걸 어떻게 묘사하나. 그런 고민으로 자료를 찾고 책을 뒤지다보니, 이런 세상에, 그 시대에 정말로 다 있었다. 괘종시계나 안경이나. 시집안 간 처녀의 머리카락으로만 만든 가채를 언급한 건 그 정도로 양반들의 사치가 극에 올랐지만 백성들은 머리라도 잘라 입에 풀칠하고 있다는 얘기였고, 그 정도로 사치스러웠으면 향락적이었을테니 기방도 더 화려하고 문란하게 만들었다. 남자들은 비단 도포자락이 나날이 길어져 소매를 좁게 만들라는 어명을 내려달라는 상소가 있었는데 그걸 참고로 청렴한 수사관이자 사상적으로도 양반과는 다른 서주필의 소매는 일부러 좁게 제작하기도 했다. <한성별곡>에서 서주필만 폭이 좁은 도포를 입는다. 이건 아직 아무도 모르더라. (웃음)
고증을 위해서 공부한 게 아니라 개인의 욕망을 표현하기 위한 배경으로서의 고증된 소품들이 필요했다. 사실 고증하기 싫었으니 퓨전사극이라고 한 거였지. (웃음) 그래서 종이방탄조끼 같은 건 원래 정조 이후에 만들어진 물건인데 미리 당겼다. 그 속에서 장르적 재미를 주기 위해서 디테일한 것들을 보여주기도 했다. 서주필이 도포자락을 끈으로 묶는 장면이나 무술을 연마하는 장면 같은 것들.
: 임금에게 칼을 뽑았던 강재순의 목이 잘리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는데, 그걸 흑백톤으로 처리한 건 심의 때문인가?
곽정환 감독: 심의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좀 막나가는 편이라서(웃음) 그냥 가려고 했는데 조연출인 송현욱 감독이 재안했다. 이 친구가 현실적인 균형감을 잡아준다. <불멸의 이순신> 조연출을 하던 친구인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감각도 좋다. <한성별곡> 타이틀과 티저 예고를 연출했는데 보고 경악했다. 너무 멋져서. (웃음)
: 주요 인물들의 대사들을 보면 <한성별곡>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모호한 것 같기도 하다. 임금과 박상규는 목숨의 무게에 대해서 얘기하지만 결론은 없고, 신념에 따라 움직이던 황집사는 마지막 순간에 “모르겠다”라고 중얼거린다.
곽정환 감독: 나는 캐릭터들의 한계를 그리고 싶었다. 황집사도 그렇고 이조판서도 마찬가지고, 모두들 신념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엔 자기 한계를 가진 인물들로 보이길 원했다. 임금마저도 이나영의 아비를 죽인 이유는 결국 자기 한계 때문이다. 박인빈은 우리 시대의 보통 아버지들처럼 보수적인 어른이고 양만오나 박상규는 계급적 콤플렉스가 심한 인물이고. 결국 말하고 싶은 것은 그들이 서로 강렬하게 부딪치는 지점에서 지금 현재의 우리들, 시청자들이 자기 삶의 고민의 한 부분을 느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의미 있는 드라마이자 가치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게 어렵고 난해하게 받아들여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렵고 모호해도 그런 난해함은 호기심으로 작용할 거라고 믿었는데 시청률을 받아보니 사람들은 내 생각과는 다르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
수신료의 가치를 생각합니다
: 시청률에 대한 압박감을 느끼나.
곽정환 감독: 시청률은 아직까진 절대적인 기준이다. 게다가 월화 미니시리즈의 연출을 맡고 있으니 내 역할에서 오는 책임감도 느끼고 있고. 어쨌든 나는 대중문화란 결국 땅에 발을 딛고 사람들과 소통해야한다고 생각하지만, 일단 시청률이 두 자릿수도 안 나온다는 건 고민해야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는 나는 KBS 드라마의 공영성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하는데, 드라마적 재미와 메시지를 담으려는 것도 그 때문이다. KBS 2TV가 젊은층에게 가까워지기 위한 내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장르물을 고민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 연출자로서 <한성별곡>이 기존 드라마와 분명히 다른 지점을 설명해주면 좋겠다.
곽정환 감독: 일단 내러티브 구조가 확실히 다르다.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건 등장인물들의 입출입과 등퇴장이다. 그런데 나는 내 드라마에서 그걸 의도적으로 싹 빼버린다. <한성별곡>도 마찬가지다. 대화도 분위기를 잡은 뒤에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시작한다. 모든 씬의 첫 커트가 타이트 바스트로 시작되는 것도 갈등과 충돌이 씬마다 있기 때문이다. 그 충돌들을 이어 붙이려면 바짝 조여야한다. 매 컷 마다 드라마 작법을 깨뜨렸는데, 그게 너무 급하고 정신없다고 하니까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8부작 미니시리즈에 맞는 새로운 호흡을 만들고 싶었다. 8부작 드라마는 16부작을 반으로 나눈 게 아니다. 그래서 편집도 달라야 하고 속도감도 달라야 하는데 요즘엔 이런 시도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은 게 아닐까 싶어서 고민하게 된다. 단지 연출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대중성, 공영성, 여기에 KBS라는 문제까지 맞물려 있어서 내게는 어려운 숙제다.
: 첫주 방송 마지막에 나오던 ‘수신료의 가치를 생각합니다’라는 문구가 2주부터 빠졌다.
곽정환 감독: KBS 드라마의 공영성에 대한 고민을 하다가 우발적으로 넣은 문구였다.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게 아니라 공중파에서 수신료라는 것이 정말로 중요하고 소중하며 가치 있다는 얘기를 하려던 것인데 막상 나가자마자 일주일 동안 좀 복잡했다. 생각해보니 조연출과 내가 단독으로 그런 얘기를 박아넣은 것도 문제가 있었고. 하지만 방송의 공영성과 KBS의 역할이라는 부분에 있어서는 여전히 생각이 많다. 다양성과 공영성이 확보되어야 드라마 시장 자체가 편중되지 않은 채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시청자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자는 문제의식이 시청률이 높으면 된다는 논리만으로 설명되어서는 안된다.